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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제법 괜찮은 풍경들

충남 서산 / 해미읍성의 노을

이우형 2016. 1. 13. 23:51



옛날부터 성곽은 도시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역시 성()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숱하게 많은 성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산악지형이 많은 우리나라는 방어와 공격에 유리한 산성(山城)을 지역마다 축조해 전란에 대비했다.

중국의 성이 대부분 평지에 지어진 것과 달리 우리나라의 성은 산성이거나 평지와 산이 이어지는 평산성(平山城)이 주를 이룬다. 그렇다고 평지성(平地城)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려 때부터 주요지방도시에 건축되기 시작한 읍성(邑城)이 대표적이다. 특히 해안지역에 있는 마을 대부분에는 읍성이 존재했다고 한다. 사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최대 104개의 읍성이 존재했다는 기록도 있다. 읍성은 조선말까지 원형을 유지한 채 이어져 왔지만,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1910년 내려진 일본의 읍성철거령이 그 원인이다.

하지만 아직도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읍성들이 남아 있다. 마을주민들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살고 있는 순천의 낙안읍성이 대표적이다. 사진의 해미읍성은 성곽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읍성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해미읍성 내에 민가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성곽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1970년대 들어 민가와 시설들을 모두 철거한 탓이다

해미읍성을 찾은 것은 우연한 기회에서다. 계획 없이 떠난 여행의 종착지였기 때문이다. 계기는 그랬지만 궁금하기는 했다. 아주 오래전 가 본 순천 낙안읍성의 기억 탓이기도 했다. 성곽 안에 옹기종기 지어진 민가의 모습이 굉장히 인상 깊었었다. 해미읍성도 그런 기대를 가지고 찾았다. 하지만 기대는 이내 깨졌다. 성곽의 보존 상태는 좋았지만 내부는 넓은 공원의 분위기였다. 옥사, 동헌 정도의 건물, 그리고 전시용으로 남아 있는 몇 채의 민가는 썰렁한 느낌을 주었다.

어쨌거나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충청병마절도사가 근무하던 군사요충지였다.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서 잠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한다해미읍성은 천주교와도 관계가 깊다. 해미읍성은 많은 천주교인들이 잡혀와 이곳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순교했던 장소다. 옥사 앞 회화나무에는 당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런 이유로 지난 20148월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 폐회미사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집전하기도 했다.

사진은 동헌 앞 느티나무 사이로 해가 지고 있는 모습이다. 가끔 옥사 앞의 회화나무와 동헌 앞의 느티나무를 비교하는 글을 읽을 때가 있다. 1,000여명이나 되는 천주교 신자들의 모진 박해를 함께 겪었던 회화나무와 지배계층과 관리들의 풍요와 영화를 함께한 느티나무의 삶이 비교된다는 그런 의미의 글이다.

인생도 그렇듯 모든 삶에는 희노애락이 있고, 새옹지마가 따른다. 누군가의 말처럼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주어진 시간과 환경에 노력하며 살 따름이다.

지금 회화나무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로 지정되어 서산시의 관리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