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여행이야기/전통의 향기 (5)
들꽃소리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1542년(중종 37년)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처음 설립했다. 주세붕이 회헌(晦軒) 안향(安珦)을 기리고자 그가 어릴 때 공부하던 숙수사 옛터에 문성공묘(文成公廟)란 사당을 세워 위패를 모시고 영정을 봉안한 것이 그 시초다. 이듬해인 1543년(중종 38년) 이 사당을 기반으로 백운동(白雲洞)서원이 창건됐다. 첫 유생은 3명이었다. 1549년(명종 4년)에 풍기군수로 내려온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백운동서원을 정식 교육기관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임금이 직접 서원의 이름과 편액을 써서 내리는 것을 사액(賜額)이라고 하는데, 1550년 명종이 직접 소수(紹修)라고 쓴 현판을 하사했다. 이로써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됐다. 사액서원이 되면 상..
일주문은 사찰의 진입로 초입에 세우는 문이다.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어 일주문(一柱門)이라고 부른다. 일주문에는 문 없이 기둥만 두 개가 서 있다. 알기쉬운건축용어사전에 따르면 '물리적인 통제의 문이 아니라 마음의 문이라는 의미'여서 문이 없다고 한다. 기둥 두 개로 어떻게 서 있나 싶지만, 그래서 더 특별해 보이는 문이다. 최근에 만들어진 일주문은 대부분 지붕이나 기둥을 받치는 별도의 보조 기둥이 있지만, 오래된 일주문들은 온전히 기둥 두 개로만 지어진 것이 많다. 부석사는 천년고찰이지만, 일주문이 들어선 것은 1980년이다. 일주문에는 '태백산부석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일주문 현판에는 이렇게 산 이름과 사찰 이름이 함께 들어간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주변으로 사과 과수원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
부석사는 경상북도 영주시 봉황산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유서 깊은 천년고찰이다 보니 그 간의 사연도 많고, 국보나 보물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사진의 당간지주 역시 부석사가 보유한 보물 중 하나다. 부석사 당간지주는 일주문에서 부석사로 올라가는 길옆에 서 있다. 사과로 유명한 영주는, 일주문에서 부석사로 올라가는 길옆에도 과수원이 있고, 가을에는 사과 파는 풍경이 눈길을 끈다. 부석사를 찾은 때는 10월이었고, 풍기에서는 인삼축제까지 열려 볼거리가 풍성했다. 전날 흐렸던 날씨는 이날 오전 거짓말처럼 맑았다. 파란하늘과 기분 좋은 가을 햇살까지 완벽했다. 그 길에서 만난 당간지주 끝에 태양이 머물고 있었다. 정면에서 한 컷 촬영하고 뒤로 돌아가서 만난 사진이다..
서원은 조선중기부터 전국에 세워진 일종의 사립학교다. 서원은 두 가지 역할을 했는데, 하나는 사표가 될 만한 선대 명현(明賢)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지방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다.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1542년 중종 37년에 경상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서원은 1550년 명종5년 당시 풍기군수였던 퇴계 이황의 주청에 의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임금이 친필로 이름을 지어 편액을 내린 것(사액·賜額)으로써, 요즘으로 말하면 교육부 인가의 사립학교에 해당한다. 이를 사액서원이라고 부르는데, 사액서원이 되면 왕의 친필 간판과 함께 땅과 노비 등이 내려졌고, 면세와 면역의 특권까지 주어졌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서원의 특혜를 이용한 ..
용주사를 수없이 지나쳤지만, 직접 들어가 본 것은 초등학교 이후 처음인듯 싶다. 근처의 융건능은 그런대로 자주 찾는 편인데 유독 용주사만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무심코 지나치던 그곳을 이번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 찾았다. 이번 달부터 경기도 역사기행이라는 기사를 쓰게 됐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이 세마대가 있는 오산 독산성과 이곳이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오산과 화성으로 떨어져 있지만 거리는 불과 수 Km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묶어 놓고 생각하니 성격이 조금 달랐다. 세마대는 임진왜란의 이야기가 강하게 스며 있는 곳이고, 용주사는 융건능, 수원화성과 더 인연이 많은 곳이다. 이곳을 어떻게 엮을 것인지가 요즘 고민이다. 용주사는 창건연대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깊은 고찰이다. 서기 8..